[특별기획 신나는 인생] 심부름이 즐거운 퀵서비스맨 이영훈
“소중한 희망 전달하는 배달부 되고파”

진정한 참 행복은 무엇일까.
나폴레옹은 “내 인생에서 행복했던 날은 단 6일뿐이었다”고 한탄한 반면 눈과 귀가 열리지 않은 헬렌 켈러는 “인생의 모든 날이 행복한 나날이었다”고 고백했다. 어떻게 이들은 상반된 결론을 내린 것일까. 그렇다면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정치인들이 그렇게 추켜세우는 서민들이 행복을 맛보는 눈높이는 어느 정도일까.

이번 호에서는 심부름이 즐거운 퀵서비스맨 이영훈(30) 사장을 만나 그의 작지만 소중한 ‘신나는 인생’을 들여다봤다. 젊고 야심만만한 그는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최대 무기로 삼아 험한 세상 풍파에 씩씩하게 맞서며 악착같이 살아간다. 


그렇다고 여지껏 성공가도만을 달려온 것은 물론 아니다. 이미 수없이 많은 쓰라린 좌절의 아픔을 겪어봤다. 남보다 일찍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탓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항상 웃으면서. 늘 열심히, 최선을 다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행복함을 느낀다는 이씨의 낙천적인 자세를 통해 본지 독자들은 세상살이의 눈높이를 낮추고 행복지수를 높이기를 기대해본다.


그는 젊다. 이제 겨우 갓 서른을 넘어섰다. 그러나 50여명의 거대(?) 식구를 거느린 한 업체의 어엿한 사장이다.
“젊어선 실패한다고 해도 그건 실패가 아니라 돈으로 절대 살 수 없는 경험이고 교훈이죠. 그래서 더욱 두려움 없이 세상과 맞서 적극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좋은 경험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데….”(웃음)

직업에 귀천이 따로 없다

물론 사회경력도 만만치 않다.
어느새 올해로 10년이 훨씬 넘는다. 이씨는 공부보다는 장사에 뜻이 있어 학창시절부터 돈 버는 일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이런 계산이 나온다. 그동안 돈 버는 일이라면 남의 호주머니를 뒤지는 것 빼놓고는 별의 별 일을 다해봤다.
그의 직업관은 이렇다. “직업에 귀천이 따로 없다.” 돈을 벌 때에는 궂은일을 가리지 않고, 쓸 때는 깨끗하고 보람있게 쓰면 된다는 것. 즉 남들 이목을 신경 쓰지 않는다.
이씨의 직업은 퀵서비스맨.
사장인 그도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며 고객과 만난다. 나이도 어린데 어떻게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냐고 그는 의아스러움을 나타낸다.
전북 익산시 남중동에 위치한 30평 남짓한 공간이 그의 사무실.
이곳은 그에겐 삶의 터전이고 밑천이다. 비록 남 보기에는 보잘 것 없어 초라해 보일지라도 그에겐 피땀 흘려 일궈낸 소중한 일터인 셈이다. 주변의 어떠한 도움 없이 이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루 평균 수면시간 4시간. 그의 하루는 아침 8시부터 시작돼 다음날 새벽 4시는 돼야 끝난다. 간혹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낮잠을 자기도 하나 이런 달콤한 시간은 어쩌다 한번이다. 그래도 행복하단다. 딴 잡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일할 수 있어서 그렇단다.
대개 마수걸이는 도시락
 

이영훈씨는 무서운 게 없다. 뭐든지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사진은 직원들과 함께 화이팅을 외치는 모습)

배달.
그는 출근과 동시에 메모를 들고
사무실을 나서 오토바이에 시동을 건다.
총알처럼 아파트에 도착해 어머니의 정성 가득한 도시락을 접수하더니 곧바로 한 고등학교로 이동한다. 교실에서 도시락을 받아든 아들의 표정에선 함박웃음이 터진다. 이처럼 오전엔
도시락 배달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등교시간 전후론 주로 학생들 관련 심부름이 많은 편이죠. 집에다 깜빡 놓고 온 교과서나 수업 준비물이 주류를 이룬다. 등교시간이 끝나면 관공서나 회사 서류배달 등이 시작되고요
심지어 담배 심부름도 있어요. 오후엔 주부들이 콩나물 5백원치, 두부 한모 등 반찬거리가 대다수를 차지해요. 저녁시간 이후엔 유흥업소 종업원들이 저희를 많이 찾아요. 택시는 이래저래 돈이 많이 들잖아요. 특히 손님들에게 ‘수고했어요’ 한마디 들으면 피곤함이 싹 사라지게 돼요.” 


이렇다보니 업종이 정확하게 감이 잘 안 잡혔다.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봐선 이른바 퀵서비스가 분명한데 하는 일들을 보면 궂은일도 마다 않는 심부름센터에 가깝기 때문이다. 꽤 그럴듯한 연관성이 있으면서도 전혀 색다른 일처럼 느껴졌다.
그에겐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도 사람 없다’는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남들은 간혹 젊은 남자가 할 일이 없어 아줌마들 반찬거리 심부름한다고 핀잔을 줄지 모르나 그는 ‘배운 것 없고 돈·기술 없는’ 본인에게 이만한 게 없다고 해맑은 미소를 머금었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평생 남의 심부름만 하면서 살겠다는 이씨. 그는 평등의 시대에 오히려 불평등한 위치에 자신을 내려놓는다.
누구나 갑부가 되면 하인이라도 쓰고 정치가라면 비서라도 부릴 것이다. 그는 이런 사람들의 심리를 파고들었다.
“보통사람들은 때론 사소한 일이지만 대접받고 싶어질 때가 있지 않겠어요. 말 한마디 전화 한 통으로 내 일을 누구에겐가 마음놓고 시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물론 부담되는 가격이라면 당연히 안되죠.”

겉모습과 달리 예의바르고 공손

어떻게 이 일을 하게 됐는지 사연이 궁금해졌다.
이씨는 사고 꽤나 치고 다니던 악동이었다고 스스럼없이 고백했다. 그것도 너무 일찍 되바라져서 부모님 속을 상당히 썩였다고 한다. 심지어 가출을 무려 7번이나 했다고 하니 더 이상 언급이 필요 없을 듯싶다. 한마디로 공부와 담을 쌓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만 좋아했다.
하지만 17세 때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게 됐다. 오토바이를 타다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생각하게 된 것. 1년 넘게 병원생활을 하고 퇴원한 그는 그때부터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 다잡았다.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그의 얼굴엔 1백50 바늘이나 꿰맸다던 당시의 심각했던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다. 사실 콤플렉스다. 때문에 속 모르는 사람들이 소위 조직이나 건달생활을 할 때 입은 부상이 아닌가하고 의심할 때 이씨는 가장 난감하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특히 단순히 외모로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이씨는 겉보기와 달리 주변 어른들에게 인사를 깍듯이 하는 등 예의바르고 정중한 것으로 정평이 자자하다.
장사가 뭔지도 모르면서 남의 밑에 들어가 일을 배우고 또 배웠다. 이때 우연히 그는 다방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심부름과 퀵서비스를 조합한 아이템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왜 다방에 손님들이 오면 심부름 같은 걸 시키곤 하잖아요. 담배나 신문 사오는 일 같은 거죠. 대신 심부름을 해주면 잔돈푼을 주곤 했죠. 그땐 아무 생각 없이 받았는데 어느 날 이런 일을 하면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이 오더라고요.”
그렇게 그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 50cc 오토바이 2대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일선에 나섰다. 퀵서비스란 이름도 한참 뒤에 서울에서 그렇게 부른다고 해서 알게 된 것이다. 때문에 초기엔 상호도 ‘심돌이 심부름’이었다고 한다.
초기엔 이름 때문에 겪은 해프닝도 많다.
 

서른살 이영훈씨는 사장이자 직원이다. 그 역시 여느 직원과 마찬가지로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며 고객과 만난다. 나이도 어린데 어떻게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냐고 그는 의아스러움을 나타냈다.

심부름이라고 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소위 흥신소로 착각을 한 것. 느닷없이 아내나 남편의 불륜현장을 잡아달라는 전화를 수없이 받았단다. 물론 개같이 번다는 그의 신조에 따라, 돈이 되는 일이니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씨는 개같이 벌어도 정직하게 돈을 벌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어 뿌리쳤다.

과거 경험삼아 불량학생 지도

전북 익산 시내를 기준으로 심부름 값은 단돈 3천원. 돈의 가치야 매기기 나름이지만 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제법 늘었다. 그는 한번에 대박을 터뜨리기보다는 푼돈이 모여 큰돈이 되는 소중함을 배웠다. 그 일대에선 경쟁 업체가 전무할 정도로 이씨 업체는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과거에 남의 밑에서 구박받으면서 배우고, 조그맣지만 내 사업하며 실패한 게 큰 자산이 된 것 같아요. 그런 밑거름이 없었다면 사람들과 함께 일을 못하죠.”
 

한편 그 역시 처음엔 돈 버는 일에만 관심을 쏟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학원폭력과 왕따 문제 등이 지역사회에 대두되면서 이씨는 달라졌다. 자신도 자식을 키우는 사람이고, 나름대로 빗나간 학창시절을 보냈던 뼈아픈 경험이 있어서다.
“부모들이 전화해서 자기 아이 보디가드 좀 해달라는 거예요. 등하교 길을 태워다 주는 거였죠. 아이들 이야기를 조금씩 듣다보니까 미력하지만 남을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이때부터 그는 불량학생들을 직접 만나 타이르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불우한 소년소녀 가장과의 인연도 이를 계기로 시작됐다. 현재 이씨는 전 직원의 20% 정도를 소년가장들로 뽑고 있다. 이들을 일부러 직원으로 뽑는 이유가 있다. 그는 이들에게 일회적인 동정보다는 경제적인 자립심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토바이 탄다고 남들은 우습게 볼지 몰라요. 하지만 자기만 열심히 하면 한달에 생활비 정도는 충분히 벌 수 있죠. 일부러 좋은 일도 하는데 돈 받고 좋은 일 하는 거잖아요. 이런 게 일석이조 아닌가요.”

성강현 기자 <sungp@ilyosisa.co.kr>
 

[창업]이영훈 사장, 전국 체인망 목표 '오늘도 달린다'
오토바이 퀵서비스 창업 성공...창업 8년만에 직원 70여명
이덕춘기자 / 2007.05.29
 
전북인의 자존심을 걸고 반드시 전국 규모의 오토바이 퀵서비스 회사를 만들겠다는 이영훈사장.
전북인의 자존심을 걸고 반드시 전국 규모의 오토바이 퀵서비스 회사를 만들겠다는 이영훈사장.

“저희 심돌이 퀵서비스는 고객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요. 불법은 빼고요. 담배 심부름에서 아이들 귀가서비스까지 안하는 것이 없죠”
심돌이 퀵서비스 이영훈 사장(34·익산시 남중동)은 자신이 경영하는 심돌이 퀵서비스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 사장이 심돌이 퀵서비스를 시작한 때는 지난 1998년.오토바이를 좋아했고 오토바이로 영업을 해본 경험을 살려 오토바이 퀵서비스 사업을 구상했다.

또 아이가 태어나면서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었다.
“당시에 전북에는 오토바이 퀵서비스가 없었어요. 그래서 오토바이 신부름센터를 생각했죠.
아는 후배 2명과 함께 익산에서 시작했어요”
처음 시작은 쉽지 않았다.
홍보가 문제였다.

오토바이 퀵서비스의 편리함을 모르는 고객들은 쉽게 오토바이 퀵서비스를 찾지 않았다. 


또 아예 오토바이 퀵서비스를 모르는 고객들도 많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사장은 유니폼도 준비하고 전단지도 뿌렸다.
고객과 언제나 함께 하기 위해 편의점처럼 24시간 영업 전략을 세웠다.
고객들을 만날 때마다 인사말도 있지 않았다.
이 사장과 직원들의 입에서 ‘심돌이 퀵서비스입니다’라는 말이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서 심돌이 퀵서비스는 서서히 고객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어린 아이들이 ‘삼돌이 퀵서비스’라고 놀리기도 했다. 이렇게 심돌이 퀵서비스가 익산에 자리를 잡자 이 사장은 힘을 냈다.
바로 심돌이 퀵서비스 군산점과 전주점을 오픈하기로 마음 먹은 것.
“익산에서 영업을 시작한지 8년만에 직원이 70여명으로 늘어났어요. 영업이익도 많이 생겼고요. 그래서 군산점과 전주점을 열기로 마음 먹었죠”
지난해 5월1일 군산점을 열었다.
익산 본점을 오픈 할 때보다는 조금 편했다.
벌써 익산의 심돌이 퀵서비스가 군산까지 소문이 나 있었다.
또 익산 고객들이 군산으로 옮겨 사는 경우가 있어서 한결 쉬웠다.

이 사장은 군산에서 다시 한번 힘을 얻었다.
군산점 직원이 20여명을 넘자 전주 상륙에 자신감을 얻은 것.
“군산은 잘 모르는 곳이라 조금은 겁이 났어요. 하지만 입소문이 나 있어서 자리 잡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았죠”
군산점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전주점 오픈 계획을 세우고 지난 3월 1일 문을 열었다.
지금은 전주점 직원이 10여명 정도.
아직 오토바이 퀵서비스에 익숙하지 않은 전주 시민이지만 이 사장은 큰 꿈을 가지고 있다.
전국 단위 오토바이 전문 퀵서비스 체인점망을 구축하는 것.

사업이 쉽지 않지만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 사장은 체인점 확장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객의 편의를 위해서 또 저의 사업 발전을 위해서 전국 규모의 오토바이 퀵서비스 회사가 필요해요. 전북인의 자존심을 걸고 반드시 전국 단위 오토바이 퀵서비스 회사를 만든 거에요”
34살의 젊은 퀵서비스맨의 미래가 관심을 끈다.